그리고 짧은 생각

1. 박에스더 혹은 김점동

짧은 생각 2019. 3. 19. 07:30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는 박에스더입니다.
1877년에 출생하여 1910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남녀를 불문하고도 양의로 두번째 또는 세번째라고 합니다.
( 첫번째는 서재필인데, 두번째가 박에스더라는 설과 김익남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여성 인권이 아주 낮았을 때인 구한말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이르게 여의사가 탄생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박에스더의 본명은 김점동입니다.
그의 남편은 박유산이고 그래서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따서 박에스더라고 한 것입니다.
이 박에스더의 이야기를 보고 흥미로웠던 것은 박유산이라는 남편이었습니다.

김점동과 박유산의 결혼은 셔우드 홀이라는 의료 선교사의 중매로 이루어집니다.
셔우드 홀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의학을 배우고 싶어했던 김점동은 남편과 같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박유산의 삶은 김점동에게 맞추어집니다.

처음 김점동은 병원에서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며 공부를 하지만
그때나 요즘이나 그렇게 공부하기엔 의학공부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은 접고 볼티모어에서 학업에 전념합니다.
그러다보니 생활비와 학비까지 남편이 전부 담당하게 됩니다.
막노동, 농장노동, 식당일등으로 박유산의 희생으로 박에스더는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박에스더도 두번의 유산 경험이 있다고 하니 결코 쉽지 않은 유학생활이었을 것입니다.

졸업 2개월을 앞두고 박유산은 폐결핵으로 숨을 거둡니다.

당시 남존여비가 횡행했던 시절.
부인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고
부인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사람.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중 박에스더는 한국으로 돌아와 많은 진료와 헌신으로 그 또한 35세에 숨을 거둡니다.

한 사람의 공은 한 사람의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도운 헌신적 사랑이 있음을 보여준 박유산.
그의 사진이나 이야기는 별로 없으나 왠지 다시 보고픈 남주인공입니다.


잠깐, 박에스더를 의학의 길로 인도한 셔우드 홀. 그의 아들은 한국에서 결핵병원을 세우고 치료했으며 아직까지도 유명한 크리스마스 실을 만든 분이라 합니다.